들어가며

가치투자를 한 번이라도 공부해본 투자자라면 워런 버핏의 이름을 모를 수 없다. "경제적 해자가 있는 기업을 사라", "10년 이상 보유할 기업에 투자하라" 같은 격언들은 거의 투자 입문서의 공식처럼 따라붙는다. 나 또한 그의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거나,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 나온 어록을 단편적으로 옮겨 적어본 기억이 있다.
다만 그 호기심은 대부분 그의 재력과 그가 차지한 자리에서 멈췄다. 즉 버핏의 결과(부)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가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워런 버핏이 어떤 인물인지,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떤 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해왔는지 깊이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워런 버핏의 마지막 강의』는 그 미루어둔 공부를 한 번에 하게 해준 책이다. 김봉기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가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의 핵심 Q&A를 인생, 투자, 기업, 국가라는 네 영역으로 묶어 편역하고 해설을 더한 책으로, 단순한 투자서가 아니라 한 인물이 평생 견지한 사고의 골격을 보여주는 책에 가깝다.
왜 '마지막 강의' 인가
2025년 5월 주주총회를 끝으로 버핏은 공식 무대에서 물러났다. 60년 동안 매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고, 비슷한 결을 가진 답을 해온 사람의 마지막 발언이라면.. 그 무게는 단순한 투자 조언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가 주주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문장들은, 결코 주식시장에만 결부되어 있지 않았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해진다. 버핏이 강조하는 복리는 단지 자산의 복리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지식 축적과 평판의 복리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회계는 회계장부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언어"이며, 그것을 모른 채 사업이나 투자를 한다는 것은 외국에서 통역 없이 협상에 나서는 것과 같다. 그가 자본배분을 말할 때는 한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가 아니라 한 국가의 통화 신뢰까지 같은 원리로 설명된다. 즉 이 책의 네 영역인 인생, 투자, 기업, 국가는 서로 다른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 체계가 적용되는 네 개의 스케일이다.
평생 가져가고 싶은 문장들:
오래 붙잡는 문장들이 있었다. 단순히 좋은 말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평소 어떻게 투자하고 있고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았기 때문이다. 6개의 계명으로 정리해보고 싶다.
계명 1. 습관의 무게를 가볍게 보지 말 것 (p.77)
습관의 사슬은 처음엔 너무 가벼워 느껴지지 않지만, 나중엔 너무 무거워서 끊을 수 없게 된다. (The chains of habit are too light to be felt until they are too heavy to be broken.)
투자 습관은 처음 한두 번의 매매에서 형성된다. 무심코 시작한 단타가, 무심코 따라간 종목 추천이, 어느 순간 자기 정체성을 결정해버린다. 매수 버튼을 누르는 빈도, 손실 종목을 쳐다보는 빈도, 그 모든 것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투자자상을 만든다. 가볍게 시작한 습관일수록 끊어내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늘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계명 2. 인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p.116)
인내란, 기회가 오면 그날 오후에라도 행동할 준비를 갖추는 것과 결합된 개념이죠.
평소의 나는 정반대로 행동해왔다. 진짜 기회를 알면서도 망설이고, 그러면서도 평소에는 도박하듯 매수매도를 의무처럼 반복해왔다. 인내는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할 때를 알아보고 그때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 평소엔 손을 멈추고, 결정적 순간에는 주저하지 않는 것. 그 두 가지가 결합되어야 비로소 인내라고 부를 수 있다.
계명 3. 복리와 시간, 그리고 실질 가치 (p.135, p.166)
이익 창출력의 네 갈래(p.135)를 읽으며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이건 진짜 투자자라면 4계명처럼 여기저기 붙여놓고 마인드컨트롤해야 되는 책이라는 것. 복리를 믿자. 시간을 믿자. 부란 갑자기 쌓아올리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화살표의 이정표를 견고히 하는 공부, 그것만이 지름길이다.
이 부분은 166쪽과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하다. 한탕의 흥분을 좇아 카지노로 몰려가기보다, 실질적인 가치와 생산을 만들어내는 기업과 활동에 더 많은 관심과 자본을 보내는 것이다.
복리와 시간을 믿는다는 것은 곧 실질 가치를 알아본다는 것과 같다. 카지노식 흥분은 시간을 압축하려는 시도이고, 그 시도는 대부분 시간에 의해 보복당한다.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사는 것은 결국 '빨리'를 사는 것이다.
계명 4. 네 가지 필터 — 충족되지 않으면 아무리 싸도 사지 않는다 (p.180)
버핏의 네 가지 필터: ① 이해 가능성, ② 장기 경제성, ③ 신뢰할 수 있는 경영진, ④ 합리적 가격표. 이 네 가지 자체도 훌륭하지만, 더 핵심은 한 줄 뒤에 있다.
충족되지 않으면 아무리 싸 보여도 투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투자 실수는 필터 자체를 몰라서가 아니라, 필터를 알면서도 "이번만은 예외"를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가격이 너무 싸 보일 때, 모두가 사고 있을 때, 단기 모멘텀이 너무 좋을 때, 우리는 자기만의 필터를 슬쩍 비껴간다. 버핏이 위대한 이유는 새로운 비법을 발명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필터를 끝까지 지켰다는 데 있다.
계명 5. 존경받는 사람은 말과 행동이 같다 (p.214)
사람들은 존경할 수 있는 관리자를 원합니다. 말은 이렇게 하라고 해놓고 자신은 다르게 행동하면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관리자였던 적이 있고, 누군가의 그런 관리자 아래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투자자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본인이 장기투자를 외치면서 일주일 만에 종목을 바꾸는 사람의 말은, 본인의 다음 결정에서도 신뢰를 얻기 어렵다. 외부의 신뢰는 내부의 일관성에서 출발한다.
계명 6. 경기에서 내려올 줄도 알아야 한다 (p.268)
버크셔는 불리해졌을 때 무리해서 유리해지려 하지 않는다. 경쟁이 위험을 더 떠안는 경기로 바뀌면, 버크셔는 그 경기에서 내려온다.
주식시장에서의 매수매도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인가? 아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승부욕이 너무 강해서, 공부도 그 승부욕으로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그런 기조가 남아있다. 그래서 처음 매매할때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다. 즉 실패하기 십상이었다. 내가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경기에만 배팅해도 승률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시장이기 때문이다.
경기에서 내려올 줄 아는 것. 룰이 바뀌었을 때 그 룰을 따라 무리하지 않는 것. 그게 진짜 힘이다. 공학적으로 말하면 시스템이 자기 동작 영역을 벗어났을 때 무리하게 출력을 짜내지 않고 셧다운을 선택하는 능력에 가깝다. 그런 셧다운 메커니즘이 없는 시스템은 결국 회로 전체가 타버린다.
계명 7.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의 가치관을 빌릴 것인가 (p.332)
프랭클린과 나무 아래 있었다면, 내가 할 일은 그의 길을 막지 않고 계속 생각하게 두는 것.
보통 우리는 "남의 의견을 따라가지 말라", "뇌동매매는 패망의 지름길이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다. 그런데 버핏은 자신보다 명석한 사람의 사고를 그대로 흡수하려 했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태도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엇을 따라가느냐의 문제다. 뇌동매매는 그 사람의 매수 타이밍을 따라가는 것이고, 버핏이 프랭클린을 대하는 방식은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따라가는 것이다. 전자는 결과를 복제하려는 시도이고, 후자는 과정을 흡수하려는 시도다. 결과는 운에 좌우되지만 과정은 누적된다.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매수 종목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기준으로 그 종목을 선택했는지, 어떤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따라가야 한다. 버핏이 본 프랭클린의 가치는 홀짝을 잘 맞추는 능력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사고의 골격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명석한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의 무엇을 반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계명 8. 멀리서 보면 일희일비할 일이 줄어든다 (p.355)
"미국 예외주의는 끝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버핏의 답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미국의 강점으로 꼽은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 규모가 아니라,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고쳐나갈 능력, 다양성과 창의성, 장기적 시야, 이상적 낙관이었다.
이 답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가 한 국가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사고의 골격에 있다는 점이다. 완벽한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떤 기업이든 어떤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늘 사소한 사건 하나에 일희일비한다. 분기 실적 하나, 정책 발표 하나, 환율 변동 하나에 흔들린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그 사건들 대부분은 큰 그림에서 잡음에 불과하다. 진짜 봐야 할 것은 그 시스템이 자기 결함을 인정하고 고쳐나갈 능력을 갖고 있는가, 다양성과 창의성을 허용하는 구조인가,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장기적 시야를 유지할 수 있는가다.
이건 투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좋은 기업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기업이 아니라, 실패를 빠르게 인정하고 수정하는 기업이다. 좋은 투자자는 한 번도 손실을 본 적 없는 투자자가 아니라, 자기 판단의 결함을 인정하고 다음 결정에 반영할 줄 아는 투자자다. 멀리서 볼 줄 아는 시야가 결국 일희일비를 줄여준다.
누구나 버핏이 될 수 있을까
다소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감상으로 짚어두고 싶다. 즉각적인 질문에 이런 답변이 나온다는게, 즉각적인 답변이 강의나 책으로 출판될 수 있다는게, 읽으면서 든 생각은 "버핏은 천재다"였다. 그를 따라 가치투자를 공부한다고 모두가 버핏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은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옅어졌다.
11세부터 주식을 사고, 회계를 모국어처럼 다루며, 60년 넘게 한 도시에서 한 회사를 운영하면서, 매일 5~6시간씩 연차보고서를 읽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모델은 아닐 것이다. 아마 전업투자를 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이렇게 하시는 분들은 정말이지 드물듯 하다. 거기에 찰리 멍거 같은 평생의 사고 파트너까지 곁에 있었다는 점은, 단순히 "노력하면 된다"로 환원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즉 그의 성과는 재현 가능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특정 초기조건에서만 수렴하는 해에 가깝다. 같은 입력을 넣어도 같은 출력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버핏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버핏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으려 했는가, 어떤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며 살아왔는가를 따라가 보는 것이 이 책의 진짜 효용이다. 결과를 모방할 수는 없지만, 사고의 프레임은 옮겨올 수 있다. 평범한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버핏의 수익률이 아니라 버핏의 질문법이다.
버핏의 수익률을 따라가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60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반복해온 사고의 골격을 보게 한다는 데 있다.
왜 그가 마지막까지 같은 말을 했는지, 왜 그의 조언이 단순한 주식시장의 언어가 아니었는지, 왜 가치투자라는 개념이 인생과 기업과 국가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단계적으로 짚어준다. 부록으로 실린 'Owner's Manual' 또한 책의 무게감을 한 단계 더 단단하게 만든다.
가치투자 입문서를 한두 권 읽어본 뒤 "그래서 결국 무엇을 하라는 건가?"라는 막연함에 부딪힌 투자자들에게, 그리고 단순히 종목을 고르는 차원을 넘어 자기만의 투자 철학을 정리하고 싶은 직장인들에게 권하고 싶다. 버핏이 될 수는 없어도, 버핏이 어떤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졌는지는 충분히 옮겨올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옮겨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투자자의 의사결정은 한층 단단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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